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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의 개념과 범주 20)

Money2Karus 발행일 : 2022-05-08

 그러나 1908년 도입된 노령연금법은 보험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이 법은 무각출(non-contributionary) 국가연금으로 7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매주 5실령의 연금을 제공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무각출연금이든 보험원칙의 안이든 노령연금의 도입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를 제기한 단체는 우애협회(friendly societies: 공제조합)였다. 우애협회는 노동계급의 소득에서 공제하는 기여금을 놓고 국가와 경쟁하는 것을 원치 않앗다(Fraser, 1984). 따라서 이들은 영국의 사회보험이 도입되는 데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자리잡는다. 또한 1834년 이후 국가개입의 쇠퇴와함께 빈민구호가 주로 민간의 자발성에 의존하면서 강성해지기 시작한 자선조직협회(C.O.S) 역시 자조의 원칙에 위배되는 연금법안에 대해 반대활동을 펼친 단체였다. 그러나, 우애협회는 사망률의 감소와 함께 재정상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보험방식의 노령연금이 아닌 무각출 노령연금은 일정정도 우애협회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1908년 노령연금법을 수용하는데, 이 노령연금법은 여전히 수급자들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규정을 갖고 잇었을 뿐 아니라, 라운트리가 지적한 최저생계비 7실링에도 못미치는 급여를 제공하였다. 이는 여전히 자유주의적 이념이 강성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 1911년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은 질병과 실업문제에 대하여 보험원칙을 도입하였다. 구빈법조사위원회의 두 가지 안에 대하여 로이드 조지가 탐탁지 않아 했으며, 보험원칙을 선호했던 이유는 일단 보험원칙이 실용적이며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했고, 여러 가지의 정치적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로이드 조지는 노인들뿐 아니라 환자, 실업자, 과부, 고아 등 요보호계층에 소득보장을 확대시키기를 원했지만, 당장 부딪힌 문제는 재정문제였다. 노령연금의 비용이 첫해 애초 추산한 650만 파운드를 넘어 800만 파운드에 이르게 되자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이 적극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한다. 즉 노동자와 고용주로부터 필요재원을 조달받을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험원칙은 당시 강력한 사회적 가치였던 자조의 원칙에 충실할 수 있었다. 또한 정치가인 로이드 조지에게 있어 사회보험제도는 첫째, 무엇인가 대중들의 관심을 끌 만한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었으며, 둘째, 구빈법 조사위원회의 대립된 두 입장을 타협시킬 수 있는 절묘한 방안이었다.
 즉 다수파 보고서의 보수적 구빈법의 재정립도 아니고, 급진적 페이비언 사회주의로의 진전도 아닌 정치적 타협안으로 설정될 수 있었다. 셋째, 사회보험제도는 당시 노동당을 비롯한 페이비언 사회주의로의 진전을 막는 장치로 설정되었다. 즉 사회보험제도는 웹 부처가 이야기했던 '국민최저수준'(nationalminimum) 을 제공함으로써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막는 기제로 설정하였던 것이다(Fraser, 1984). 로이드 조지의 사회보험 안에 대해 우애협회, 의사, 상업보험회사에서는 상당한 반대가 있었지만, 제반 이익집단의 타협안으로써 최종적인 국민보험법안이 만들어졌다. 예컨대, 우애협회가 제공했던 요양급여(medical benefit)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하여 로이드 조지는 의사와 상업보험회사를 동원하면서, 상업보험회사의 주된 상품이었던 생명보험 때문에 과부와 고아에 대한 급여를 포기해야 했다. 이와 가튼 정치적 타협과정을 통해 1911년 국민보험법이 통과되었다. 영국의 국민보험법은 이미 산업화에 의해 성숙된 이익집단들의 조정과정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1935년 미국 사회보장법의 성립
 미국은 선진 자본주의국가 중 가장 늦은 1935년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통하여 비로소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사회보장법이 제정된 배경은 전세계에 밀어닥친 1929년 대공황의 여파였다. 대공황은 미국 사회를 유례없이 마비시키기 시작하였는데, 1929~32년 사이 GNP는 874억 달러에서 417억 달러로, 산업생산지수는 110에서 57로, 임금총액은 50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떨어졌다. 이 여파로 실업자는 15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상승하였다. 이러한 대공황의 참상은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적 가치관을 변화시켜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제반 움직임들을 창출하였다.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진 실업자단체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932년 미국실업노동자동맹연합(Federation of Unemployed Workers Leagues of America)라는 전국 단위의 조직체가 결성되어 연방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실업대책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60세 이상의 모든 노인에게 매달 200달러를 지급하라는 타운샌드운동(Townsend Movement)이나 재산세, 상속세, 소득세 등을 부과하여 실업수당과 노령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 런딘(Ernest Lundeen)의 법안들이 급속도로 지지자들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배영수, 1983; Rimlinger, 1971).
 이에 대응하여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행정부는 직접구호와 공공사업의 발주를 내용으로 하는 대규모의 공공구호사업을 통해 실업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사회보장제도의 수립으로 이를 보완하는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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